느리게 보게 하는 이보배의 사진
<그 사이에: 틈새 관찰일지> 전시 서평, 2025년
글. 고대웅 (작은도시이야기 편집장)
틈. 우리는 살아온 시간과 경험, 몸에 밴 습관과 믿음이 겹쳐 만들어진 좁고 긴 자신만의 틈을 통해 세상을 본다. 어린 시절 호기심이 흐려질 때쯤, 내가 바라본 것이 세상의 일부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서서히 잊혀지고, 눈앞에 들어온 풍경은 어느새 세상의 전부로 굳어진다. 시야와 경험의 한계는 세계의 경계가 된다. 예술은, 사진은 좀 더 직설적으로 그 단단한 시야에 새로운 확장의 기회를 만든다. 다른 사람의 시선을 빌려 익숙한 세계를 낯선 높이와 속도로 바라보게 한다.
이보배 작가는 사진기를 들고 대상을 바라보는 시간이 쌓인 뒤에야 자신이 무엇을 보고 있었는지 알 수 있었음을 이야기한다. 작가에게 사진은 세상을 기록하는 도구이기에 앞서, 자신의 지난 시간으로 돌아가는 길을 함께한 동행자였다. 동시에 타인의 세계를 이해하고, 이웃들의 삶에 이미 깃든 가치를 드러내는 관계의 매체로 기능했다.
삶의 속도가 마음보다 앞서갈 때, 지나온 시간은 충분히 이해되지 못한 채 남기도 한다. 작가는 사진을 찍으며 그 시간으로 천천히 돌아갔다. 카메라를 통해 풍경과 사람을 오래 바라보는 동안, 지나온 시간 속의 자신 역시 판단해야 할 존재가 아니라 이해하고 다독여야 할 한 사람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피사체를 쫓던 발걸음이 쌓였고, 사진은 작가가 자신에게 다가가는 길을 열어 주었다.
이러한 시선은 작업을 대하는 방식에서도 나타난다. 《외딴집 프로젝트》는 이사 후 새로운 환경에서 느낀 이질감과 경계심에서 시작된다. 처음에는 자신을 불편하게 대했던 한 노인과 그가 늘 머물던 벤치가 관찰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작가가 베란다에서 벤치를 반복해 바라보는 동안 그곳은 단순한 시설물이 아니라, 이웃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시간을 보내는 작은 사랑방으로 드러났다. 느리게 보는 시간은 낯선 존재를 익숙한 이웃으로 바꾸었고, 경계심이 있던 자리에는 그들과 함께 살아가고 싶다는 마음이 들어섰다. 불편함은 애정이 되었고, 그렇게 공동주택 게시판은 작은 사진전이 열리는 전시장으로 전환된다. 서로의 일상을 발견하고 소통하는 이웃들의 시간이 더해진다.
작가의 시선은 하나의 벤치에서 현관문으로, 다시 동네 전체로 넓어진다. 《그 이웃》에서는 96가구의 닫힌 현관문을 기록하며 가까이 살지만 쉽게 다가가지 못하는 이웃 사이의 거리를 바라본다. 이어진 《그 동네》에서는 주민들이 직접 바라본 송정동의 일상을 모으고, 아파트와 주민센터, 마을버스 정류장은 갤러리가 된다. 다시 한번 공동의 공간이 전시장으로 변화한다. 작가 혼자 시작한 관찰이 이웃의 참여로 확장되고, 한 사람의 시선은 여러 사람이 함께 동네를 바라보는 경험이 된다. ‘느리게 보기’가 ‘함께 보기’로 이어지는 과정이다.
《그 사이에: 틈새 관찰일지》는 이보배 작가의 ‘틈새로 보기’를 더욱 선명하게 보여준다. 몸과 마음에 쉼이 필요했던 시기, 작가는 낯선 도시의 작은 아파트에 머물며 발코니 밖을 바라보았다. 나무에 걸린 청바지를 기록하다가 건물 사이의 좁은 틈으로 바쁘게 지나가는 사람들을 발견했고,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행인을 기다리며 기록을 이어갔다. 좁은 틈 속에서 사람들은 잠시 나타났다 사라진다. 제한된 시야는 오히려 한 사람을 더 오래 기다리고 상상하게 한다.
그러나 가만히 서서 어딘가로 향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일은 평온하기만 한 경험이 아니었다. 작가는 걷고 달리는 사람들과 멈춰 있는 자신을 비교하며 “이대로 쉬어도 되는가”라는 불안을 느꼈다고 한다. 하지만 다시 그 사진들을 꺼내 본 작가는 과거의 멈춤이 단절이 아니라 다음 삶으로 이어지는 시간이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작업이 오랫동안 묵혀 있다가 다시 관객과 만난 과정 역시, 버려진 듯 보였던 시간이 새로운 시작의 계기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보배 작가의 일련의 작업을 보고 있으면 도시와 시각문화를 연구해 온 크리스토프 린드너와 도시문화·정치생태학 연구자 미리암 마이스너가 말하는 ‘슬로 아트(slow art)’를 떠올리게 된다. 이는 단순히 천천히 감상하는 예술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도시의 움직임을 잠시 중단시키고 시각적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림으로써, 가속화된 일상과 급격한 공간 변화에 저항하는 실천에 가깝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보배 작가의 사진은 사람의 걸음을 느리게 하고, 우리의 틈 안으로 타인의 삶과 풍경을 들인다. 결국 중요한 것은 느린 형식 자체가 아니라, 그 느림이 무엇을 다시 보게 하고 누구와 관계를 맺게 하느냐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Lindner & Meissner, 2015).
그런 의미에서 이보배 작가의 느림은 도시의 속도를 잠시 늦추는 데서 멈추지 않는다. 빠르게 지나치며 놓쳤던 사람을 이웃으로 만나게 하고, 미처 이해하지 못했던 지난날의 자신을 다시 바라보게 한다. 카메라의 틈으로 바깥을 바라보지만, 그 시선은 다시 작가 자신에게 돌아온다. 그리고 작가가 발견한 틈은 작품을 통해 다른 사람의 시선과 만난다.
이보배 작가가 건네는 틈 앞에서 우리는 잠시 걸음을 늦춘다. 그리고 알게 된다. 세상을 바라보던 나의 틈은 타인을 통해 확장될 수 있다는 것을, 멈춰 있던 시간 또한 다음을 향해 이어지고 있었다는 것을. 느리게 본다는 것은 어쩌면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틈을 이해하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더 많은 것을 보기 위한 일이자, 미처 이해하지 못했던 자신에게 다가가기 위한 일이기도 하다. 나아가 그렇게 발견한 장면을 곁의 사람과 나누며, 서로의 틈을 서로에게 또 하나의 창으로 내어 주는 일로 귀결된다.